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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카오산 입구
    Category: 풍경
    Area: 타카오

    초심자도 안심! 세계에서 가장 등산객이 많은【다카오산】 녹음이 우거진 자연, 원숭이가 뛰노는 사루야마, 온천, 미술관 등의 관광지도 많고, 무엇보다도 신주쿠에서 약 한 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최근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은 바로, "다카오산(高尾山)". 2007년에는 미슐랭 3스타를 획득하면서 더 큰 인기를 얻게 되었고, 지금은 연간 300만명이 찾아오는 명산이 되었습니다. 등산에 익숙하지 않은 초심자나 아이와 함께 가벼운 기분으로도 놀러갈 수 있는 다카오산의 매력을 소개합니다.다카오산의 역사 나라 시대~가마쿠라 시대 다카오산은 예로부터 신앙의 산으로서 사람들이 많이 찾던 산이었습니다. 천평(天平) 16년(744) 불교를 깊이 믿던 쇼무 천황(聖武天皇)은, 국가의 평화를 지키는 기원사(祈願寺)창립을 명령했고, 쇼무 천황의 칙명을 받은 스님 ‘교키(行基)’가 다카오산에 "다카오산야쿠오인유키지(高尾山薬王院有喜寺)”를 창건합니다. 그 당시부터 해오던 슈겐도(修験道, 산에 틀어박혀 수행하는 종교)의 수행은 대대로 이어졌고, 다카오산의 "폭포 수행"은 지금도 유명합니다. 시간이 흘러 1375년, 황폐해져버린 다카오산을 ‘교토 다이고 산’의 ‘슌겐 다이토쿠(俊源大徳)’라는 스님이 복원하는데요, 이 때 지금의 본존 불상이신 "이즈나 다이곤겐(飯縄大権現)"이 약왕원(薬王院)에 봉납 되었습니다. 그 이즈나 다이곤겐과 함께 봉납 되었던 것이 텐구(天狗)이며, 이를 계기로 다카오산에서 텐구 신앙이 퍼지게 되었고 이후 텐구는 다카오산의 상징으로서 추앙 되어 왔습니다. 전국 시대~에도 시대 전국 시대에 접어들면, 다카오산은 호조(北条) 씨의 영토가 되고, 호조 씨가 정한 대숲 벌채 금지 법에 의하여 보호됩니다. 1500년대 후반, 호조 씨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패한 뒤 다카오산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통치 하에 들어가지만, 이후에도 에도 막부에 의해 자연 보호 및 나무 심기 활동이 이뤄졌습니다. 이러한 활동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그 결과 다카오산에는 지금도 풍부한 자연이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쇼와 시대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자 다카오산도 전쟁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직접 공습을 당하는 일은 없었지만, 조선이나 전쟁으로 인한 피해 복구에 사용할 목재로 쓰기 위해 대량의 나무가 벌채 되었습니다. 그런 뒤 1950년에 도쿄 도립 다카오 진마 자연 공원이 생기고, 1970년에 국정공원으로 지정되어, 자연스럽게 보호 받고 복구 된 결과 지금의 다카오산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2007년, 다카오산은 도심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풍부한 자연이 보호되고 있다는 점을 높게 평가받아, 미슐랭 3스타를 획득했습니다. 일본에 있는 산 중에서 3스타를 획득한 산은 ‘후지산’과 ‘다카오산’ 뿐입니다. 다카오산은 난대, 온대, 한대의 경계에 있기 때문에, 각 계절마다 다른 식물이 자라나 색을 바꿔갑니다. 선조들이 소중하게 보호해왔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풍부한 자연이 남아, 일본을 대표하는 관광지가 될 수 있었겠지요.

    27.aug 2018

  • 낮시간의 요요기공원

    광활한 삼림 공원【요요기 공원】을 소개합니다! 시부야와 하라주쿠의 사이에 있는 "요요기 공원(代々木公園)"은 푸른 자연이 펼쳐진 도립 공원입니다. 도시락을 펼치고 느긋하게 밥을 먹어도 좋고 사이클링을 하거나 스포츠를 즐기기에도 좋습니다. 「도심에서 가장 넓은 하늘이 보이는 공원」을 컨셉으로 내건 도시의 오아시스를 소개합니다.요요기 공원의 역사 에도(江戸)시대부터 메이지(明治)초기 에도시대, 현재의 요요기 공원 부지 일대는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가 에도가와성의 방어를 맡았고, 다이묘(大名)와 하타모토(旗本)가 둥지를 튼 무가저택(武家屋敷)이었습니다. 그 주변에는 백성들의 주거지나 밭이 넓게 펼쳐져 있었습니다. 도쿠가와 막부(徳川幕府)가 끝나고 메이지 유신기에 돌입한 일본에서는 서양화・근대화가 이뤄졌습니다. 그 중에서, 요요기 공원 부지는 군의 연병장으로 사용되어 당시는 "요요기노하라(代々木の原)"라고 불렸습니다. 이 연병장은 미나미 토시마(南豊島) 황실 소유지였던 현재의 메이지 신궁 일체와 인접하고 있었습니다. 연병장은 당초 초원이었지만 훈련이 진행되면서 풀이 벗겨지고 모래 먼지가 날려 주변 주민들은 큰 피해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연병장 이전을 요구하는 주민회가 열립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군대의 중요성이 증가했기 때문에 계속 연병장으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1964년 도쿄 올림픽 <amp-img width="640px" height="420px" src="https://s3-ap-northeast-1.amazonaws.com/thegate/2019/06/10/11/40/11/Yoyogi-Park-1964-Tokyo-Olympics-Memorial.jpg" layout="responsive" alt="요요기 공원 도쿄 올림픽"></amp-img> <small> 1964년에 개최된 도쿄 올림픽 기념비 </small> 제2차 세계 대전 후, 연병장은 GHQ에 압수됩니다. 그 철거지에는, "워싱턴 하이츠"로 불리는 진주군(進駐軍)과 그 가족을 위한 종합 시설이 세워졌습니다. 800채 이상의 주택에다 학교・교회・병원・극장・클럽 등이 만들어지고 그들의 생활 거점이 되었습니다. 그 뒤 일본은 고도 경제 성장기에 돌입합니다. 1964년 도쿄 올림픽 개최가 결정되고 메인 장소로 신궁 지구가 선택됩니다. 거듭된 협상 결과, 워싱턴 하이츠의 부지가 일본에 귀속되고 선수촌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도쿄 내 유일한 삼림 공원」의 시작 <amp-img width="770px" height="514px" src="https://s3-ap-northeast-1.amazonaws.com/thegate/2019/06/10/11/44/26/Yoyogi-Park-South-Gate.jpeg" layout="responsive" alt="요요기공원 남문"></amp-img> <small>가을의 요요기공원</small> 때마침 이 땅 일대를 "도쿄 유일한 삼림 공원"으로 개조하는 계획이 시작됐습니다. 올림픽 후 그 계획은 본격화되어 건물을 모두 헐었고, 1966년부터 5년에 걸쳐서 재배 운동이 진행됐습니다. 공원 경계에는 장목, 밤나무 같은 상록 활엽수, 중앙 광장에는 느티나무・단풍나무 같은 낙엽 활엽수, 계절별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벚꽃・은행 나무・노송 나무・히말라야 삼나무들이 심어졌습니다. 이렇게 도내 유수의 규모를 자랑하는 공원이 완성된 것입니다.

    18.jul 2018

  • 아오시마 신사의 토리이와 사전
    Category: 신사와 사원
    Area: 미야자키

    정글에 둘러싸인【아오시마 신사】에서 결연의 이익을! 미야자키현 남동부의 아오시마에 진좌 하는 "아오시마 신사(青島神社)". 아열대 식물로 뒤덮인 아오시마 내에서, 한층 더 눈에 띄는 새빨간 신전이 특징적입니다. 일본 신화의 무대이기도 하며, "야마사치히코(山幸彦)"와"도요타마히메(豊玉姫)"가 이 땅에서 사랑을 키운 것으로부터 인연의 신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게다가 10개의 발원(願掛け, 소원을 비는 것) 신사(神事, 신에게 지내는 제사)가 있어, "인연"이나 "돈"등의 눈이 그려진 주사위를 흔드는 "사이노메 신사(賽の目神事)"는 나온 눈이 인도의 신이 되는 제사입니다. 아오시마 주변은 "도깨비 빨래판"이라 불리는 기암에 둘러싸여 있으며, 간조 때에는 암석을 산책할 수 있습니다. 아오시마 신사의 역사 아오시마 신사가 창건된 정확한 연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헤이안(平安) 시대의 전기(伝記) "휴우가 토산(日向土産)"안에 등장했던 것에서, 820년대 부터라고 여겨집니다. 지금은 많은 참배객이 방문합니다만, 옛날에는 아오시마 전체가 신성한 장소였기 때문에 한정된 사람만이 참배할 수 있는 신사였습니다. 아오시마 신사에 모셔져 있는 "히코호호데미노미코토(彦火火出見命)", "토요타마히노미코토(豊玉姫命)", "시오즈츠노 오오가미"(塩筒大神)는 일본신화 “야마유키히코와 토요타마히메”에 등장하는 신들입니다. 이 아오시마의 땅에서 결혼하여 사랑을 키웠다고 합니다. 아오시마란 어떤 곳? <amp-img width="1000px" height="666px" src="https://s3-ap-northeast-1.amazonaws.com/thegate/2019/06/11/11/24/00/Aoshima-Yayoi-Bridge.jpg" layout="responsive" alt="야요이 다리"></amp-img> <small>야요이 다리</small> 아오시마 신사가 진좌하고 있는 아오시마는 미야자키현 미야자키시에 위치한 둘레 1.5km의 작은 섬입니다. 대안을 잇는 "야요이 다리(弥生橋)"를 건너 아오시마에 갈 수 있습니다. 섬내에는 수많은 아열대 식물이 우거져, 비로야자나무나 하이비스커스 등, 평소 쉽게 볼 수 없는 식물들이 가득. 귀중한 아열대 식물군은 국가 천연기념물로도 지정되어 있습니다. 뚜쿠뚜쿠를 타고 이동할 수도 있다 <amp-img width="770px" height="513px" src="https://s3-ap-northeast-1.amazonaws.com/thegate/2019/06/11/11/23/55/Aoshima-Tuktuk.jpg" layout="responsive" alt="아오시마를 달리는 뚜쿠뚜쿠"></amp-img> <small>뚜쿠뚜쿠</small> 아오시마 해안에서 아오시마로 가는 길목은 주로 동남아시아에서 달리는 삼륜 오토바이와 같은 "뚜쿠뚜쿠(뚜벅뚜벅)"가 운행되고 있습니다. 아오시마역에서 아오시마 신사의 눈앞까지 태워 주기에, 어린이나 어르신 분이라도 편하게 이동할 수 있어 편리합니다.

    18.jul 2018

  • 오모테몬과 오모테몬바시

    이곳에서만 느낄 수 있다! 역사가 남아 있는【데지마】 일본이 쇄국정책을 펼친 건 1600년대 부터 약 200년간. 당시, 서구 국가들과의 유일한 무역 거점이었던 곳이 바로,「데지마(出島)」입니다. 데지마는 나가사키현(長崎県) 중부에 위치하는 인공섬으로 그 면적은 단 4,000평. 그 당시, 포르투갈 및 네덜란드에서 온 선교사들과 상인들에게는 축구장 단 2면분 부지에서만 무역과 문화교류를 허용했습니다. 400년 전의 건물은 얼마 남지 않았지만, 대부분이 당시의 건물을 본뜨는 방법으로 재건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 복고적인 분위기와 에도시대 특유의 거리 풍경을 즐길 수 있어, 일본 국내외에서 관광객들이 모여드는 명소가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그런 데지마의 매력과 체크해 봐야 할 관광 스폿들을 소개합니다. 데지마의 역사 <amp-img width="1000px" height="666px" src="https://s3-ap-northeast-1.amazonaws.com/thegate/2019/06/12/15/59/57/Dejima-Street.jpeg" layout="responsive" alt="고요하고 레트로한 거리"></amp-img> <small>레트로한 거리</small> 데지마는 1636년에 포르투갈이나 네덜란드와 무역을 위해 만들어진 인공섬입니다. 쇄국의 큰 이유 중 하나였던 기독교의 탄압이 진행되는 가운데, 나가사키에서는 무역 수입을 중요시한 막부와 현지의 호상(대상인) 25명에 의해서, 무역 특화 지구로서 건조되었다고 합니다. 서양 국가로부터는 직물이나 도자기, 설탕을 일본에서는 구리나 간장 같은 물건들이 수출입 되고 있었습니다. 당시, 쇄국정책을 펼친 일본에게 있어서는 매우 귀중한 장소였습니다. 하지만 그 면적은 약 4000평 정도로 극히 제한된 가운데 교역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데지마의 큰 특징이라면 바로 그 형태. 해안을 따라 "부채꼴"로 만들어졌다는 것.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그 중 하나로는 당시의 장군이었던 도쿠가와 이에미츠(徳川家光)가 데지마의 건설이 결정되었을 때, 자신의 부채를 꺼내서 “이것을 견본으로 삼으라”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현재의 데지마는 메이지 시대나 고도 경제성장기의 매립 공사의 관계로 더이상 "섬"이 아니게 되었고, 지형도 바뀌어 버렸습니다. 또한 섬 내의 건물도 그 대부분이 당시를 본떠 재건된 것입니다. 초기의 데지마는 포르투갈 선교사의 체재 장소로서 기능하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시대「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의 교역에 사용되었습니다. 데지마는 유럽과 미국에 열린 유일한 창이기도 해 물건의 교환 뿐만이 아니라, 최신의 의료 기술이나 무기, 과학 정보도 얻고 있었습니다. 19세기 초에는 주거, 레스토랑, 창고 등을 중심으로 50여 개의 건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약 그 10년 후, 일본은 마침내 개화기를 맞이했고 그로 인해 데지마는 "서구와의 유일한 무역항"이란 의의를 잃고서 쇠퇴해 갑니다. 메이지(明治)시대에 들어서는 주변이 매립되어 버리기도 했습니다만, 그 역사적인 중요성에 의해 1950년대에 데지마의 재흥 계획이 시동했습니다. 지금은 과거의 건물 약 절반 가량이 재현되어 있습니다.

    23.may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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